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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Note.
doohee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퀘스트 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어른들께 공손하게 인사 잘하기'였다. 당시 나는 유치원에 가는 대신 바둑학원에 다녔고, 바둑학원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범절을 가장 중요시하는 곳이다. 따라서 언제나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기에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에 특별한 수고가 더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방과 후였다.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어른들마다 붙잡아 세워두고 두손을 가지런히 모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야만 했는데, 그때마다 국민학생이었던 오빠는 그런 내가 창피하다며 혼을 냈던 것이다. 어린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대체 인사를 해야 하는 어른과 하지 말아야 할 어른은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그때부터 나는 내가 '아는' 어른들께만 인사를 하기로 했다. 나의 타깃은 야쿠르트 아주머니, 두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동 경비아저씨였다.
야쿠르트 아주머니와 두부 할아버지는 약속 시간이 되면 동네에 어김없이 등장하셨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롤러블레이드로 갈아 신고 나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다 보면,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골목 어귀에서 살구색 리어카를 끌고 옆 동으로 이동 중인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하고 두 손을 모아 인사를 드리고 나면, 마치 밀린 숙제를 끝낸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고, 조금 더 착한 어린이가 된 것만 같은 성취감이 차올랐다.
두부 할아버지는 오후 4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리는 트럭을 끌고 등장하셨다. 할아버지가 다가오는 소리는 이제 내가 집에 들어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그날도 저 멀리에서부터 가까워지는 종소리와 술래잡기를 하며 열심히 바퀴를 굴려 집으로 올라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께서 순두부 한봉지를 사 오라며 천원을 쥐여 주셨다. 트럭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내 순서가 왔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부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순두부 한봉지만 주세요!]

할아버지는 뜨거우니 조심하라며 플라스틱 바가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를 퍼서 간장 양념장과 함께 검은색 봉지에 담아주셨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두 번이나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다. 5층 베란다 창문에서는 내가 잘 오고 있는지 빼꼼 얼굴을 내밀고 계신 엄마의 실루엣에 마음이 급해졌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경비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기만 하면 그날의 모든 임무가 완벽히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시에는 동마다 1층 출입문 바로 옆에 경비실이 작게 붙어 있었는데, 인사를 드려야 할 우리 동 경비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미션이 실패될까 불안한 마음으로 유리창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그때, 아저씨가 늘 앉아 계시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소보로빵 한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와 소보로빵이라니! 창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나에게 그는 단지 내가 마주칠 때마다 반드시 인사를 드려야 하는 '동네 어른들께 인사하기 퀘스트'를 주는 어른 NPC 중 한 분일 뿐이었다. 쉬면서 빵을 드신다거나, 빵 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맛을 고르는 그 분의 아파트 밖 일상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빵 하나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유리창을 열어주었다.

누구에게나 따듯한 소보로빵이 있고, 그 빵을 발견하는 것이 내가 하는 작업이다. 나와의 관계 밖에서 타인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 1인 방송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마이크를 잡고 있는 내가 언제나 주인공이고, 시청자들은 방송을 채우는 관객으로서만 자리한다. 그러나 한명 한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세상으로 잠시 들어갔다 와보면 그제야 내 모니터를 메우는 채팅 중 하나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을 내 작품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가장 화나게 했던 순간은 언제인지, 가장 행복했던 저녁 식사는 어떤 것이었는지 등 모두가 겪어봤을 감정에 대한 그 만의 사적인 기억을 재료로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했다기보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면서 재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백의 캐릭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를 빌려 나의 수백 가지 모습들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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